[1] “ 미안하다 아가야... ”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 지금의 기술로는 어찌할 수도 없는 불치병이 하필이면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걸린건지. 미래에는 분명 치료법이 나올거야. 그럴거란다. 조금만 안에서 기다리렴. 좀 아플거란다. 아버지는 동면장치를 기동시켰다. 아버지가 말하는 미래가 언제일지 모른다는 사실은 어린 마음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만 나는 차마 도망갈 수도 없었다. 나보다도 더욱 눈물 흘리는 아버지를 봤으니까. 꼭 나을테니 희망을 잃지 말고 조금만 잠들어있어 달라고 말하는 아버지가 나보다도 더욱 어린아이같이 엉엉 울고 계셨으니까.
마음을 제대로 먹은 것은 그때였다. 미래에는 꼭 나을게요. 아빠. 아빠, 사랑해요. 보고싶을 거예요. 뺨에 닿는 큰손이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때는 아직 무궁화호의 문화가 정상적인 상태였던 향해 초기의 어느 날이었다.
[2] 눈을 떴을 때에는 지옥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뭔가 이상했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얼마나 잠에 들어있었는지도 모르게 먼저 알아차린 것은 역시나 무언가가 잘못되어있다는 것이었다. 냉동보존장치, 거기에 들어가기 전에 아빠는 내가 미래에서 깨어나면 내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있을 거라고 약속하셨단 말이야. 하지만 그 약속은 완전히 엉터리였어. 완전 엉터리!
냉동보존장치에서 나온지 일주일이 다 돼 가지만 여전히 나는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고, 두려워. 이게 다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안 가. 아빠. 무서워요. 미래에는 괜찮아질거라면서. 미래에는 내 약이 있을 거라며? 미래에서는 내 병을 낫게 할 수 있을 거라며?
거짓말쟁이. 아빠는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여기 있고 싶지 않아. 여긴 끔찍해. 정말,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야. 내 진짜 엄마나 아빠도 가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멍청하게 굴거나 그런 말을 한 적이야 있지만… 그건 정말 지금 저 김씨라는 남자의 발끝도 못 따라가. 그만큼 무식하고 멍청한 사람들밖에 없다고!
나아진 건 아무 것도 없어. 앞으로 나아질 수도 없을 거야. 과거보다도 퇴색된 미래에서는 내가 살아남을 방법따윈 없을 거라고,
아프다고도 해봤지. 정말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아파서 큰소리를 꽥꽥 내질렀어. 그제야 의원이라는 사람을 부르던데, 세상에. 그 돌팔이는 내가 완벽하게 건강하다는 거야! 이게 말이 돼? 내가 병에 걸려 아프다는 것도 모르는 게 무슨 의원이라고 뻔뻔하게 칭호를 달고 다니는 거야?! 봐. 제발 내 말 좀 들어. 내가 왜 이렇게 창백한데, 내가 왜 이렇게 말랐는데. 내가 왜.. 내가 왜! 제발 내말 좀 들어! 내말 좀 들으란 말이야!
[3] 꼬록, 하고 배가 울더라.
현애의 뱃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 가능하지 않은 것에 문을 굳게 잠근 채 나가지 않는 대신의 방법을 선택했다. 이 개떡같은 미래에는, 엉망진창에 무식한 인간들밖에 남지 않는 미래에서는 뭐든지 까마득하다. 답도 보이지 않고, 헤쳐나가야 할 길조차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아 저녁식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의원은 문제가 없이 건강하다고 하질 않나, 언니라는 작자는 뭐라고 한 줄 알아? 내게, 내게 뭐라고 말한 줄 아느냐고.
세상에, 예의가 없는 건 둘째 치고 나보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얘기하는 거야! 뭐?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해? 눈물이 왈칵 차올랐어. 더는 싫어. 이 끔찍한 미래가 싫어.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꾹 참았어. 아니라고. 아니란 말이야. 나는 현애고, 항해 초기였던 과거에서 왔고.., 아름답지도 않아! 나를 돌려보내줘. 아빠 엄마가 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목이 메여오는 것에 더는 길게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아 결국 소릴 질러버리곤 도망치기로 했어.
“ 난 아름다운 게 아니라 면역체계에 이상이 있다구요! ”
그 여자는 뭐라고 했냐고?
...
기억 안 나. 아마 모르는 단어나 썼다고 뭐라고 했겠지. 멍청한 여자.
나는 그 여자가 싫어. 나랑 똑같을 걸. 그 여자도 나를 싫어해. 이유도 없이 나를 싫어하는 걸 먼저 알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잖아.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그.. 정수라는 남자는 그 여자보다는 훨씬 친절해. 그에 비해 저 여자를 봐. 또 화를 내며 시끄럽게 굴지. 나는 저 여자가 정말 싫어. 이런 끔찍한 인간이랑 사는 건 당연히 더 싫어.
하루 종일 집에 처박혀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하는 생활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죄수같이 살아가는 데 아무런 불평불만도 할 수 없는 여리고 어린 공주님같은 게 아니야. 나는 지금도 천천히 죽어가고 있고, 어딘지도 모르게끔 아파.
나는 다시 냉동장치에 들어갈 거야.
그렇지 않는다면 그 전에 내가 죽어버릴 지도 몰라. 병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같은 걸 잔뜩 받아서 못 견디고 죽어버리고 말 거라고!
당장에 오늘 저녁부터는 단식 시위를 벌일 거야. 멍청한 여자에겐 듣지도 않을 테지만 그 나이 든 남자를 설득하기엔 나쁜 수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거든. 뭐..... 단식 투쟁이라고는 해도, 몰래 부엌에 들어가 조금씩 뭔갈 훔쳐먹기는 했어. 단식 시위라는 게 꽤 힘든 줄 처음 알았어.
아! 드디어 통했어! 늙은 남자가 입을 열었어!
냉동장치를 보여주겠대!
[4] ‘ 내가 깨고 태어난 알? ’
늙은 남자가 말하는 것이 어쩐지 불안했어. 왜 나를 다시 거기 넣을 수 없는지 보여주겠다고 할 때부터 기쁨과 동시에 들었던 불안함이 덜컥덜컥, 시끄럽게 모양을 점점 과시했어. 그래도 희망을 품고 그의 뒤를 쫓아갔지. 가는 길 도중 ‘ 깨고 태어난 ’ 이라는 대목에서 불안함을 최대치를 찍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닐 거라고 믿었어.
이런, 냉동장치가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린 모습이라는 최악을 알았지만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어.
결국 쓸모 없던 행동이었어. 날 꺼내기 위해서 이 늙은 남자는 유리를 부숴버린 거야. 널부러진 망치와 유리 조각이 냉동장치 주변에 엉망으로 널려 있었어. 유리와 함께 조각조각이 나 부숴진 희망이 혀를 놀려 비웃으며 사라져버렸어. 다리가 비틀, 하고 꺾였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데 늙은 남자는 뻔뻔하게도 입을 열어 말했지. 날 이 세상으로 불러올 적당한 시간이었다고. 적당한 시간? 적당한 시간이라고? 날 부르기... 내 병을 낫게 하기 위한 냉동장치였는데.
내 병을,
고치기,
위한,
장치였다고.
-........ 내 가 뭐라고 했는지 모 르겠 어.
입을 통해 나올 수 있는 욕이란 욕은 전부 다 뱉어냈어. 그래도 부족해. 남자는 질리지도 않고 대의를 위한 행위였다며 자신의 행동을 자기합리화시켜버렸지. 허, 웃음도 나지 않아. 이 상황에서도 잔약신부, 잔약신부.. 그러니까 내 이름은 그게 아니라고 했잖아! 대체 왜 날 그딱 식으로 부르는 건데. 소릴 질러 묻자 남자가 내 진짜 아빠가 남겨놓은 메시지 중 한 부분을 가리키며 그러는 거야. 보라고, 잔약신부(孱弱新婦)라고 써있지 않냐며.. 실제로는 전혀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았어. 절대 다른 글이었다고. 목이 아픈데도 멋대로 비명이 터져나왔어.
“ 이 멍청이! 등신! 까막눈 같으니! ”
아무 말이나 터져 나왔지만 막을 수도 없었어. 욕설이며 뭐든 잔뜩 섞인 것을 잔뜩 질러댔어. 당신 덜 떨어졌어?!, 저건 저렇게 읽는 게 아니야! 저건 ‘병으로 잔약한 내 딸에게’ 라고 돼 있는 거라고! 병으로 약한! 병으로! 글자도 모르는 이 괴물, 이 멍청이같으니! 아픈 딸에게 주는 글이라고 쓰여 있잖아! 나 말이야! 이 덜떨어진, 이 멍청한, 이 미친.... 더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선 정리가 되지 않아 더 무언갈 표효하듯 외치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늙은 남자가 점잖 빼는 어조로 묻는다.
“ 그렇다면 내가 너를 뭐라고 불러야겠느냐, 아이야? ”
아,
끊어진다.
현애라고!
내 이름은 현애야!
이미 수천번은 말한 것 같아. 마지막 비명이었다.
내 이름은 현애야. 현애. 처음부터 줄곧 당신들에게 말했던 이름. 나는 병에 걸렸고, 그래서 나는 아프고. 열 여덟이면 나는 죽어버릴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이토록이나 창백하고, 말라가고, 그러니까, 나는 과거에서 온 병에 걸린 아이라고.... 우리 아빠는 따로 있고, 나는 병을 낫기 위해서 미래로 가고 있었던 와중 당신이 알을 깼
어
알을
깨버렸다고
당신 멋대로..............
의미 없는 말을 반복했다. 다리에서 힘이 풀려 풀썩, 주저 앉았다.
[5] 의미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
그때 이후로는 큰 일이 없었다. 말다툼을 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니까.
이미 냉동장치는 부서져버렸고, 이 멍청하고 끔찍한 미래에서는 아무도 냉동장치를 고칠 줄 모를 테니까. 의미 없는 나날을 반복했다.
어차피 이 미래에서는 나는 낫지 못해. 곧 죽어버릴 걸. 나는 꿈이 있었는데.
아빠같은 멋진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던 게 내 유일한 꿈이었는데..... 꿈을 이루지도 못해, 이 지옥에서 도망가지도 못해. 재미도 없는 요리를 하는 법을 배우며 며칠 째인지도 모른 나날을 그냥 보내고 있을 뿐. 이러다 열 여덟이 되는 해에 내가 갑자기 죽어버리면 그때에는 빌어먹을 이 집안의 멍청이들이 내 말이 진짜였다는 걸 믿을까.
재미 없는 그, 뭐야. 식사 시중? 쓸모도 없어보이는 것을 하녀에게 배우면서 떠드는 것조차 재미가 없어.
하인이 있다는 것조차 아직 난 이해를 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지만. 왜 재미가 없냐니. 이들은 나름 순종적이고 나를 대우해준다지만 무슨 말만 하면 농이라고 넘겨버리거나, 고지식하고 말도 안 되는 걸 굳게 믿으며 그걸 어린 아이에게 말하듯 내게 이해시키려고만 하니까. 재미 있기가 더 힘들겠어. 호칭도 그래. 아가씨라는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으로 부르질 않나. 전에는 뭐라고 했지?
아마 요리를 배우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었던 것 같아. 그때는 정말 뒷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어.
이걸 잘 해야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대 글쎄.
참, 허. 말도 안 나오는 답이라 한참을 아무 말도 못했어. 나는 아내 같은 건 되기 싫다고 겨우겨우 말을 꺼냈더니 역시나.
하녀는 농담을 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하더라. 그래. 기대도 안 했어. 그래도 말이야. 너무할 정도라고. 나는 아직 어려. 아직 결혼을 생각할 나이는 되지도 않았단 말이야. 하고 싶어지는 그런 때가 온다면 나는 혼자서도 요리를 잘 해먹는 남자랑 결혼할거야. 그래. 말도 안 된다는 말은 이제 질렸어! 그만둬. 농담이 아니라고 했,
.. 뭐?
내, 뭐?
똑바로 말해 봐. 싸늘하게 얼굴이 굳어가더라. 나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내년에 있을, 뭐? 누구의 혼인? 내년에 있을- 나도 모르는 혼인을 하는 것에 그 남자가 걱정을 하고 있다고? 진짜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 잘못들은 게 아니라 몇 번이나 반복해 물었지만 하녀는 그저 그렇다는 대답만 반복하더라. 분통이 터졌다. 참을 수가 없어. 이 망할 지옥! 당장에 설명을 들어야겠어! 똑바로 얘기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지금 엄청 화가 났거든.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튀어나갔다. 응접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쿵, 쿵, 성이 나 잔뜩 무겁고 시끄러우며 점점 빨라졌다.
[6] “이야기 좀 해요! "
.믿을 수가 없어! 이거 농담인가요? 진짜예요? 정말로 결혼 계획을 짜고 있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성이 나 붉게 물든 얼굴이 진정하지 못하고 빼액 소리를 질러댔다. 제정신이 아니야, 도대체 결혼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도대체 뭐라고! 이 나이에 결혼을?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이냐고! 진정하니 마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이걸... 이걸 설명을 하라고요!! 흥분을 가라않지 못해 큰 언성이 나가자 또 집안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지. 그것은 내 알 바가 아니야.
나는 내 결혼이라는 황당한 것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고, 어떻게든 그것을 취소시켜야 했어.
결혼이라는 건 내가 하고 싶을 때, 내가 원하는 상대랑 하는 거예요. 한 차례 난리통을 겪고 난 후 드디어 조금 화를 식힌 상태로 앉아 얘기를 했어. 몇 년이 더 지나서 내가 완벽히 성인이 되었을 때, 그때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찾아내 마음이 맞으면 하는 게 결혼이라고요. 가족 중 누군가의 손을 빌려서 하는 게 아니라! 그게 당연한 거예요! 이게 당연한 거!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의 상식. 아무리 말을 해도 들어지지 않았다. 황제한테 시집을 가는 것이니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이냐며 어째서 넌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좋아하지를 않느냐 물어오는 것에는, 정말 그 입을, 갈갈이 찢어 꼬매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7] 잡아먹혔다.
아무리 설득을 하려 하거나 화를 내보아도 저들은 끝까지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며 나를 비난만 해. 그래. 그러면 답이 없지.
어차피 나는 낫지도 못하고 여기서 처참하게 죽어나갈텐데 여기서 저들만 더 좋은 일을 시킬 수야 없지.
황제를 만나러 가라는 아버지의 말을 거절했어. 그랬더니 정말 죽도록 때리더라. 열심히도 패더라. 그래도 그깟 폭력에 내가 굴할까 봐. 나는 아무 말이나 막 소리를 질러 댔어. 나는 절대 황제를 보러가지 않을 거야! 황제를 보게 된다면 이 등신같은 머저리 부부가 뒤에서 계략을 꾸미고 있다고 아주 낱낱이 다 얘기해줄거라고! 협박에 가까운 말이 나올 때까지 때리던 손이 드디어 멈췄어.
그래, 내가 이긴 거야!
드디어 내가 이겼어! 그 뒤로는 며칠 째 조용해. 그 협박 앞에서 둘은 아무것도 못 하는 거야.
드디어... 며칠동안은 정말 환희에 젖어 있을 수 있었지. 너무 기뻤어. 그래. 며칠동안은. 아니, 방금 전까지도. 그래, 정말 바로 방금 전까지도. 정말 기뻤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됐어? 어째서?
어째서 ?
대답좀 해 봐.
이거... 이거, 이거 말이야. 왜 나는 지금 아무런 발음도 할 수 없는지 알려줘. 이게 뭔지 말로 해줘.
나, 나 아프잖아. 나 계속 아파했잖아. 그런데도 아버지니 언니니 말을 들어주면서 버티고 살고 있었잖아. 내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어?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야? 그렇게나 큰 잘못을, 내가, 했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나한테 이래. 빨갛게 달아오른 식칼을 어떻게 자는 사람의 입에 넣었어?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까지 잔인해. 말이 안 나오잖아. 말이 안 나와. 이제 영영 못한대. 내 몸이 그래. 내 혀가 없잖아.
내 혀가,
내 혀가. 내 혀가. 내 혀가 내 혀
가. 내 혀. 내. 내 가. 내 혀가. 내
혀. 내 혀가. 내가. 내. 내. 내.내. 내. 내.
내.내. 내. 내 혀가. 혀가.
혀가. 혀가혀가혀가
혀가혀가 혀가혀
가혀가혀가혀혀혀혀사가.
나는 벗어날 수 없어? 결국 이런 꼴을 당할 뿐이야? 아프기 싫어. 이젠 다 싫어. 이제 다 싫단 말이야.....
내가 새언니, 그리고 아버지라 부르라던 김정수 부부가 시키는 일을 입다물고 얌전히 따르지 않은 이상 이렇다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면, 그럼 그때는 괜찮아져? 얌전한 여자 아이가 되어 말을 따르면 상황이 좀 더 쉬워지는 거야? 그래? 그래. 그럼 다 포기할래. 순종할래. 그게 나은 거지? 그 길을 선택하는 게 좋은 거지. 그런 거지? 그러면 나는 드디어 벗어날 수 있는 거지...............
가끔씩 떠올리다 지워버렸던 것들은 정신을 좀먹어갔다. 갉갉거리는 소리를 내며 게걸스럽게 정신을 긁어먹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 생각이 나면 어리석은 생각이라며 자책하며 떨쳐냈거늘, 다시 떠오른 그것은 다가온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도 않고 그대로 전부 다 잡아먹는다,
잡아먹는다.
잡아먹혔다.
[8] 아, 화려하고 아름다운 날!
먼지가 쌓일 뻔 했던 일기장을 꺼내들어 일기를 쓴다. 나는 말을 할 수 없는 몸이니까 이제는 이걸로밖에 말을 전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정말 오랜만에 일기장을 꺼냈어. 여유는 있었지만.. 굳이 이야기를 쓸 필요를 느낄 수 없었거든. 마지막으로 일기를 쓴 후에 나는 결혼을 했어. 이제는 황궁으로 옮겨온 지 한달도 훌쩍 넘어갔지. 그 사이에 나는 처녀도 잃었어. 내 나이대 여자아이에게는 흔한 일이라더라고.
처음으로 존경하옵는 남편님과 잠자리를 함께 한 날은 정말, 내 인생의 신세계를 보았어. 미래에서 깨어난 이래로 최고의 밤이었어. 그렇게 기분 좋은 것이 있다는 것조차 나는 처음 알았어! 놀라울 정도야. 어째서 모르고 지냈지?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이라 결혼을 할 때까지 순결을 지켜야한다고 했나봐. 하여튼, 그 다음 날에 찾아온 황비는 새언니의 말대로 못되게 굴거나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게 끝까지 상냥하게 대해줬어. 나를 걱정해주고, 많은 것을 알려줬어. 그리고 여기서는 내가 해야할 일을 지키면 그 누구도, 아무도 내게 학대를 하려 들지 않아! 이렇게 즐겁게 살 수 있던 걸까 여태까지 지냈던 미래에서의 인생이 회의감이 들 정도였어.
내 몸이 점점 아파지는 것만 제외하면 나는 요새 정말 살아갈 힘을 느끼고 있어. 사는 것에 욕심이 생기는 정도로 말이야.
황비는 친절하고, 남편은 밤이 되면 굉장해. 낮동안 보내는 황비와의 시간과 밤에 보내는 남편과의 30분의 시간이 지금은 내 생활의 원동력이 되었어.
황비는 여동생을 갖고 싶었다거나, 글을 알려주거나. 낮동안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얘기해줘.
글을 읽지 못하는 나를 배려해서 말이야.
내가 열이 너무 올라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는 날에는 사람을 불러 침대까지 옮겨 가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고, 내 머리를 부드럽게 빗겨주기도 하고.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하게 나를 대해주는 황비와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는 게 너무 좋았어. 정말 언니가 있었다면 아마 황비같은 여자였을 거야. 게다가 황비는 정말 대단한 여자야. 그 이유는 지금부터 몇 시간이나 늘어놓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대단한 건 그거였어.
황비는 내가 벙어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를 경멸하지 않았어. 그것 뿐만이 아니야. 걱정 말라며, 대답할 필요도 없다며, 자신이 그런 걸 물어봤다는 것조차도 잊어도 된다는 거야 글쎄. 벙어리가 맞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나는 엄청나게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와 동시에 겁을 먹었었거든. 그걸 다 알아봐주고 날 배려해준거야.
그러고서 두어달이 지나가면서 나는 점점 열 여덟살에 가까워지고 있었어.
그와 동시에 건강은 점점 나빠졌지. 남편과의 사랑을 나누는 도중에도 기절을 할 정도로 나는 기절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어. 황비는 이전보다도 나를 걱정하는 눈빛을 하고 보았지. 그래도 난 버틸 수 있었어. 이전보다도 더욱 내 관심사는 황비와의 담소시간과 남편과의 잠자리 두 개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야. 그 두 가지로 나는 살아갈 수 있었어.
기절하는 빈도가 잦아지고, 점점 몸이 안 좋아지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문제가 없던 때에 황비와 그의, 나의 남편 사이에서 어떠한 말이 크게 오갔다는 것을 들었어. 시녀는 더는 모르고 그저 얘기를 나누어 가지셨다는 말만 했어.
설마 문제가 있지는 않겠지.
황비는 똑똑하고 아름다우며 멋진 사람이고, 남편 또한 황비를 아끼는 것이 분명 보였으니 별일 없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며칠 뒤에 잠시 황비는 어딘가에 잠시 다녀올 일이 있다고 해서 며칠간은 황비와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해 조금 심심하고 지루하긴 했지만 괜찮았어. 며칠만 제대로 기다리면 황비는 다시 나타났거든. 어쩐지 얼굴에 낀 것 같다고 생각이 든 아주아주 옅게 느껴지는 검은 색은 피곤했나보구나, 정도만을 알 수 있었어.
[9] 있을 수 없어
나는 황비를 좋아했어.
사실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사람을 좋아했어. 언니와도 같은 멋지고 상냥한 사람이었고, 내 짧은 인생을 그나마 살 만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어. 유일하게 나에게 동정신을 가져줬던 사람이었어! 그런 사람이 죽었어. 내 유일한 친구가 죽어버렸다고.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왜 그 사람이 죽어야 해? 왜! 이게 내 운명이야? 운명의 여신이란 게 정말 존재하는 거야? 그래서 나를 증오해서 내 사람을 이렇게 데리고 가는 거야?
전부 다 흐릿해. 나는 지금 너무 아파. 검정색이 많고, 향 냄새가 지독할 정도로 짙었어. 난 거기서 울기만 했어.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내가 해야하는 것들은 하녀가 거의 다 해주었어. 나는 너무나도 약해진 상태인데다 정신을 잘 차리지 못해서 침대에서 어떻게 내려왔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였거든. 그래도 장례를 하는 데에 왔는데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저 울었지.
걱정이 너무 많아 비장에 독소가 쌓여 죽었다는 병신같은 사인에 화를 내지도 못하고 나는 장례 내내 울었어. 많이 울었어. 정말 많이 울었어.
목이 타고 얼굴이며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눈이 퉁퉁 부어가는 것도 모르고 정말 내내 울기만 했어.
말고는 기억이 나질 않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그 뒤로도 당분간 황비인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서, 애정이 고파서. 울기만 하다가 정말 죽어버릴 것 같아 나는 황제에게 애정을 구걸했어.
남편과 잠자리를 하면 그래도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을 테고, 애정이 너무 고파서. 너무너무 고파서. 그리고 돌아온 게 무엇이었느냐고.
황제는 나를 비난했어.
나는, 황실이 황비를 애도할 동안 두어 달 정도 친정에 가는 것이 됐지. 애정을 구걸하다 거절당한 내게는 그 방법밖에는 없었어. 아무리 지옥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더래도. 호위를 받으며 집에 돌아가서는 별거 없었어. 얼굴을 가린 채로 집 안으로 들어가 절을 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신경질적인 새언니의 말이나 들어주고. 거기서 나를 조롱하는 새언니를 분노로 찢어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너무나도 약해져서 무슨 일을 저지를 수도 없었어.
약한 모습을 감추고 싶은 것도 이뤄내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지.
나는 그만큼 약해져 있었고, 그러면서도 빠르게 약해지고 있었어.
[10] 전부 다 죽여버릴 거야.
그렇게 약해져버린 내가 마음을 먹은 것은, 새언니의 조롱도, 황비의 죽은 사인의 병신 같음도, 나는 눈곱만큼도 신경쓰지 않은 황제도 아니었어.
모든 일의 시초, 시발점인 그 남자였어. 아버지라 부르던 김정수의 덕이었어.
나는 너무 힘들었고, 아파서, 너무 아파서 스트레스로 침식된 생각들을 모르는 체 하며 잊은 척을 했어. 그리고 그걸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었어. 진짜 아빠같은 멋진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던, 코스프레를 취미로 두던 나를 말이야. 잊었던 것들은 취해보인 김정수가 전부 기억나게 해주었어. 내가 정말 착한 딸이라며 머리를 쓰다듬는 그 덕에 말이야. 내 꿈을 산산조각 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기뻐하는 것을 멍청하게 내게 다 말해준 덕에 나는 잊었던 것들을 되찾았어.
내 꿈을 망가뜨리고 나를 망가뜨린 남자에게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해주며 나는 이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겠지. 침묵 당한 채 망가지고 절망한 상태로… 사랑조차 받지 못한 채로.
......
아니, 나는 마지막 방법을 알고 있어.
나 자신을 사랑할 거야. 나에게만큼은 사랑받는 채로 죽을 거야.
지금의 나는 손이 떨려 제대로 칼을 쥐지도 못하고, 혼자서 나가 배를 둘러보지도 못할뿐더러, 자유롭게 행동할 수도 없어.
그 정도로 약해진 나는 사람을 찔러죽일 수는 없겠지. 그래, 찔러죽일 수는 없어, 나는. 하지만 다른 방법은 알고 있지.
황비는 글을 읽지 못하는 내게 직접 썼던 편지들을 모두 읽어주었다.
나는 내 이름 자체로 함장의 권위를 상징할 수 있고, 관리자 비밀번호는 나의 본명이야.
선내의 모두를 죽여버릴 거야. 그러기 위해서라면 생명유지장치를 해제해야 한다.
생명유지장치를 해제하기 위해 필요한 건 오로지 관리자 비밀번호뿐이다.
황
비
여
,
내 유일한 친구여, 나는 당신에게 감사를 표해요.
내게 알려준 것들을 쓸 수 있어 다행입니다.
"마지막 정오 보고서" "*뮤트" "322년 3월 4일“
"322년 3월 4일 정오보고서
원자로 상태: 정상 범위 (효율 97%, 요동(fluctuation)의 염려는 없음.)
기온: 약 23.2 °C (오차 0.1°C 이내)
출생 기록 1: 10시 35분 강지훈
시장은 오늘 9시 정각에 열렸으며 현재까지 아무 문제도 없음. 정오까지 광장에 드나든 인원수는 296명으로 예상치보다 약간 낮음.
그 외 보고 사항 없음. 한산한 하루일 것 같음."
"관리 기록" "*뮤트" "322년 3월 5일“
"322년 3월 4일 21:13:04
*뮤트 관리 모드 가동, 긴급 자료 기록을 수행합니다
322년 3월 4일 21:16:42
관리자 권한으로 생명유지 시스템이 수동으로 해제됩니다
내 이름은 단 한 번도 잔약신부가 아니었고.
당신은 그것을 증명해준 내 단 한 명의 편이자, 구원자였어.
김정수가 가지고 있던 열쇠를 훔쳐온 나는 이제 모든 걸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창고에 들어박힌 채 컴퓨터 스크린 앞에 앉은 꼴이 어쩔지 보지 않아도 흉하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놀랍게도 아무렇지도 않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땋은 머리, 흉측한 한복, 비참한 모습이어도 괜찮아.
322년 3월 4일 21:21:42
경고: 남은 산소량 25분
322년 3월 4일 21:23:10
*뮤트의 기록 사본을 새 파일로 옮김: mute2.c (종료까지 약 7분)
322년 3월 4일 21:24:42
*뮤트의 기록 사본을 새 파일로 옮김: mute2.c (종료까지 약 6분)
322년 3월 4일 21:25:58
*뮤트의 기록 사본을 새 파일로 옮김: mute2.c (종료까지 약 9분)
322년 3월 4일 21:26:42
경고: 남은 산소량 20분
322년 3월 4일 21:27:04
*뮤트의 기록 사본을 새 파일로 옮김: mute2.c (종료까지 약 30분)
322년 3월 4일 21:27:30
경고: 사용중단 계정 ‘류인호’로 접속 시도 실패, 관리자에게 보고
쿵쾅쿵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나 김정수가 크게 소릴 내지르는 것은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예의있어 보이는 말씨를 했는데도 당신은 이미 돌아간 후니 듣지도 보지도 못하겠구나.
괜찮아. 이젠 다 괜찮아. 완벽해.
코드를 입력하느라 스크린 근처에서 손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322년 3월 4일 21:31:53
경고: 사용중단 계정 ‘류인호’로 접속 시도 실패 #5, 관리자에게 보고
터미널 ID AA1112로 5번의 접속 시도 실패가 감지되었으므로 터미널 사용을 중단합니다
322년 3월 4일 21:31:59
새로운 *뮤트 자료 사본 파일: mute2.c 가 완료되었습니다
322년 3월 4일 21:32:18
관리자로 운용되는 새로운 쉘 스크립트가 저장되었습니다
끝이 가깝다는 게 피부에 닿아 알 수 있었다.
아빠, 나는 오래 기다렸어요. 오래, 아주 오래요. 내가 죽어가는 순간에도 나는 그저 기다렸어요.
아빠도 틀린 말을 하는군요. 나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나는 낫지 못했어요 아빠. 게다가 사랑스럽다고 말해주셨던 손으로 수천 명의 사람을 죽였어요.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아빠의 딸 현애는 비록 이렇게 비참하고 흉측한 꼴로 잠들지만 마지막은 아빠의 손이 닿았던 기계에서 잠들 수 있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해요. 잔약신부라는 건 죽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기에.
숨이 막혀서 괴로워요. 삑삑 대는 기계음이 귀를 자극하던 소리가 점점 옅어져가요. 아빠.
이 세상에서 나를 사랑하는 것은 이제 나 뿐이에요.
나는 모두를 죽여버리고 잠드는 나를 드디어 사랑할 수 있게 됐어요.
나는 현애를 사랑해요, 아빠.
322년 3월 4일 22:27:42
성공: 가상인격 *현애가 현재 활성화 되어 있습니다!
안녕.
원작과 캐릭터에 관한 저작권은 전적으로 크리스틴 러브 씨에게 있으며,
위 작품에 대한 2차 저작권은 황정 님(@aboxthorn)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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