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커미션

테사츄 님 작품

2019. 5. 6. 16:13

그 사람을 처음 본 것은 무척 멀리서난 아직도 또렷이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문틈의 작은 사이를 한가득 채운 푸른빛그 사람은 '지구의 바다같았다집안 어른의 뒷모습에 가려져 반쪽뿐인 눈과 손동작내게 그녀는 결단코 직접 볼 수 없는 미지였다한껏 귀 기울여 그 목소리를 듣는 게 고작인내가 별생각 없는 아이였다면 그 자리에 바로 뛰쳐들어가 그 사람과의 첫 만남이 좀 더 빨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물론 건방진 꼬마라는 첫인상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만일 그날정면에서 그 사람을 봤더라도 나는 그를 '바다'라 생각했을까만일은 만에 하나아주 희귀한 확률일 뿐내가 그런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이렇게 그리워할 수 있는 거겠지.

"아까 통신하던 분누구예요?"

"*뮤트라는 분이란다우리 집안이 보좌하는 보안 장관이시지."

"저도 만날 수 있어요?"

어른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네가 훌륭한 어른이 된다면."

그 훌륭한 어른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끙끙댔다그 사람과 만날 수 있다면 뭐든 내바칠 수 있겠다는이상한 오기고작 여섯 살이었던 나에게 가문의 생업을 가르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이었다보안 장관을 보조하는 것이 우리 가문의 생업나의 숙명무척 가슴이 뛰었다나의 피엔 그 사람 곁에 있을 수 있는 허가가 있는 셈.

어른들이 뮤트와 통신하는 주기를 알고부터는 늘 훔쳐보게 되었다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지만그 푸른빛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그런 말 있지 않은가승부는 삼세판까지사람은 세 번 용서한다뮤트에게 나의 존재는 그런 거였다딱 3번까지그러니까 내가 엿본지 네 번째 되는 때였다.

"그런데 관사에 쥐가 있는 모양인데다른 곳도 아니고 보안부에 그런 게 있으면 안 되겠지."

"쥐요?"

그 사람의 시선이 나로 향했다고 느꼈다아주 순간이었지만알 수 있었다화들짝 놀라 문을 닫지도 않고 방까지 빠른 걸음으로 갔다뛰면 안 돼여기는 관사고 나는 허 씨 가문의 사람이니까방까지 도착하고 닫은 문에 기대 바닥에 주저앉았다다리가 바들거렸다못된 짓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무서움보다는 그 사람이 나를 발견했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어른에게 혼나는 것을 능가하는 공포가 있는 걸 처음 알았다색색숨을 고르는데 방 모니터가 갑자기 들어왔다푸른색바다.

"안녕빌어먹을 쥐."

방 가득 들어온 바닷물에 목이 턱 막혔다절여질 것 같은 오싹함.

"안녕하세요."

떫은 침을 삼키고그 사람을 자세히 보았다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을 것 같은어른보다는 언니 같은 사람가지런히 정리한 금빛 단발이 인상적인 소녀였다이 사람이 뮤트이 배의 보안 장관.

"뮤트님이시죠?"

"멍청한 쥐인 줄 알았건만 꽤 영특한 쥐구나."

생긴 것과 달리 말투는 어른의 그것이었다.

"그래왜 그런 건지 들어나 볼까?"

"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4번째야네 이름 앞에 붙는 성씨를 생각해서 삼세판. 3번 봐줬어그래놓고 지금 일부러가 아니라고?"

그 사람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네가 태어나서 출생신고 찍히는 거까지 전부 내가 확인했는데 이런 쥐새끼처럼 자라다니."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내가 또박또박 말하자 그 사람은 모니터에서 튀어나올 듯이 다가왔다배경의 푸른빛은 점점 사라지고 그 사람으로 방이 그득 찼다쓰나미였다모든 걸 집어삼킬 커다란 파도파도는 나를 바라보았다나도 지지 않고 바라봤다그렇지만 사람이 바다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꽉 문 뺨을 눈물이 적셔가는 게 느껴졌다무서웠다.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제대로 일이나 하겠어?

할 거예요저도 어른 되면 일할 거라구요!

내가 악을 쓰듯 소리를 지르자그 사람은 조금 놀란 듯 보였다그러나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다음엔 볼 땐 만날 만한 사람이 되어있거라빌어먹을 쥐야.” 그리곤 왔을 때처럼 가버리고 말았다.

그때서야 나는 내 이름만으로는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훌륭한 어른그 사람에게 만날 만한 사람그게 나의 목표가 되었다그 뒤로는 그 사람과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지 않았다쥐라고 불린 게 여간 자존심 상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지그 어린 나이에도아니그 나이라서 더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나 나름의 오기였다제대로 볼 수 있을 때까지는 그 목소리조차 귀에 담지도 않겠다는밤말 엿듣는 쥐가 아니라파도에 휩쓸리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 큰 바다에 올라타 여행하는 선장이 되고 싶었다.

그 후그 사람을 만난 것은 내가 중등학교에 들어가는 열여섯 살 때였다이른바 사교계 데뷔였다정계 어른분들께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는 자리.

그 사람은 이제 바다가 아니었다우리 가문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는 *뮤트였다이제 그 이름 앞에 붙는 별의 의미를 모르지도 않았다그래서 그가 여전히 내 어린날 기억 속의 소녀여도 난 놀라지 않았다그가 변덕스럽게 겉모습을 바꾸는 걸 싫어하는 어른도 있었다진지하지 못하다며나는 그저 우스웠다그 무섭던 바다가내 또래 여자애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른들의 소개를 통하는 것이 무난하고 예의 바를 것이다어른들이 나를 *뮤트에게 인사시키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됐다하지만 인파 사이에서 눈에 익은그 금발이 보이자 나는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새삼 내가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영이구나.” 언젠가 본 적 있는 류 씨 집안사람이었다나는 그 인사를 들은 체 만 체하며 그 사람 앞에 섰다그 사람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술잔을 쥐고 있었다.

나름 사람 몰골로 자랐구나.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인사 올립니다. *뮤트님저는 허서영입니다.

흐응나쁜 버릇은 고친 모양이지?

전날에는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무엇이 재밌는지 하하하고 웃었다.

그래. 10년은 강산만 바꾸는 게 아니라 쥐도 바꾸는구나.

잔을 홀짝이며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화면 너머 푸른 눈이 무척 반짝이며 아름다웠다이 역시 어린 날내가 그를 바다로 착각했던 이유 중 하나였겠구나 싶었다.

아가한테 술은 못 주겠고뭐 바라는 거라도 있어 왔겠지?

얄상궂게 웃는 그 눈이 내 속에 자존심을 자극했다.

앞으로 10년 뒤저는 당신이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 다시 인사드릴 겁니다.

그러기를 비마.

꼭이요!

그렇게 나는 10년 만에 그 사람에게 선전포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나중에 어른들에게 버릇없이 굴었다고 혼나긴 했지만.

물론 그 뒤에도 *뮤트를 만날 일이 없진 않았다그렇지만 나도그도 입을 맞춘 듯이 필요 이상의 말은 주고받지 않았다그는 여섯 살의 나에서 무언가를 본 것일까아니면 열여섯 살의 나에게서 무언가를 본 것일까어쨌든 그는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는 때를.

학교를 졸업하고 여차여차 첫 배속을 받게 된 날의 밤형식적인 절차와 축하 연회가 겨우 끝나고 내 방에 들어왔다처음엔 조금 설렜던 제복에 벌써 피로가 묻어있었다방문을 닫자마자 모니터가 절로 켜졌다그리고 특유의 푸른 배경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뮤트가 나타났다컴퓨터를 몇 번 바꾸긴 했지만약 20년 전 그때와 거의 똑같은 상황이었다나 하나만 쑥 컸을 뿐.

이제 엿듣더라도 쥐가 아니라 우리 쪽 사람이 되었군.

내 제복 차림을 훑어보며 한 첫마디아주 흡족해보이는 말사실 이 상황이 오면 벅찰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았다.

당신 옆자리에 설 거예요.

포부가 좋은 건지바보인 건지 모르겠는데.

*뮤트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그의 대외적 모습을 본 적도 있지만내게 *뮤트는 여전히 10살 중반의 소녀였다꼭 벌레를 본 아이처럼 망가진 얼굴이 도저히 나보다 연상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이제 막 밑바닥에 들어온 신입 나부랭이가 하기엔 위험한 발언이야.

10년 전에는 막 학교에 들어가던 나부랭이그보다 10년 전에는 남 말이나 엿듣는 쥐새끼였는데앞으로 10년 후에 어떤 나부랭이가 될 줄 알고요?

건방지게 못하는 소리가 없네아가씨.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닥이는 모습이 몇 년지기 친구처럼 편해보였다나는 아직도 그가 왜 날 마음에 들어했는지 이유를 모른다그렇지만 내가 그를 좋아한 이유는 안다그 작은 체구에서 보이는 여유를나는 동경했던 것이다그게 그가 인간이 아니라 가능한 것임을 알면서도.

제복 잘 어울리는데몇 년은 입히고 싶어.

평생 입을 테니 걱정 마시죠.

나한테 신입 겁줘서 내쫓는 취미 없는 걸 감사하게 여기는 게 좋겠군.

그는 허공에 손을 뻗더니 어디선가에서 담배 개피를 꺼내들었다불이 붙어있는 상태인지 별다른 행동 없이 바로 입에 물었다.

이상해요.

*뮤트는 별말 없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보았다.

그런 모습으로 담배 피우는 거 인륜적으로도 잘못됐지만나 자랄 동안 모습이 그대로인 게 말이 돼요그런 거 자연스럽지 못해요.

포부가 큰 게 아니라 멍청이로군.

내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한모금 내뱉더니제 뒤쪽으로 담배를 던져버렸다전자니까 불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짧게 스쳐지나갔다.

상사한테 이딴 식으로 말하고 승진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 말하고는 나가버렸다불도 안 켠 방을 채우던 모니터빛이 사라지자 무척 어두웠다진즉 나가버린 모니터 앞에 서자제복을 입은 어색한 내 모습이 비췄다아까 *뮤트를 봤을 때와 비슷한 얼굴을 지어보았다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사나운 눈초리였다당장이라도 웃음 터트릴 것 같던 그의 마지막 얼굴과는 정반대인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말단인 내가 보안장관과 만날 일은 없었다그의 명백하게 나를 비웃는 그 얼굴을 마지막 기억으로 삼은 채로 한 해가 꼬박 지났다. 2년차에 꽤 보직 같은 보직을 얻었다첫 해는 인턴 같은 것이었다일하는 법을 배우자 일을 하는 건 금방이었고권리가 늘어난 만큼 책임도 늘었다

새해의 연하 파티보안부의 사람이 아니라 ’ 가문의 자제로서 참석하는 자리였다제복이 아닌 연회복이 오랜만이었다말단일 때는 조용히 지내는 게 베스트라는 집안 어른들의 말씀을 따라 이러한 자리에 참석을 지양했다성실함을 보여주는 게 보안부 사람으로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먼발치에서 그의 금발이 보였다그것까지는 다를 바가 없었지만뭔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묘하게 키가 큰 것 같은은근히 궁금했지만눈앞의 어른들을 상대하는 것도 이제는 무시 못할 나의 이었다제 상사만 챙기는 모습이 좋게 비칠 리 만무했다혹여나 아첨 떠는 놈으로 보이기는 싫었다돌고 돌아 겨우 그의 앞에 갈 수 있었다내가 처음 뱉은 말은나도 놀랄 정도였다.

“……언니?

나보다 다섯여섯은 많아 보이는 외형이었다나는 이런 나잇대의 그를 본 적이 없었다그는 내 말에 푸하핫웃으며 보란 듯이 팔짱을 끼며 담배를 물었다.

이 모습이면 불만 없나?

나는 대기 자세로 서서 가만있었다착장은 연회복이었지만몸이 기억하고 있었다내가 반응이 없자그는 바닥에 재를 탁탁 털며(물론 진짜로 재가 있을 린 없지만말했다근무시간도 아니고 그러지 마나 그런 거 안 좋아해.

그 나이에 담배를 물고안대를 낀 모습은 영락없는 군인이었다그 위화감이 이 사람이 나의 상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나이라는 게 무시할 게 못되는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옷 예쁘네.

감사합니다.

우리 제복 입은 게 더 보기 좋지만.

그는 제복 차림 그대로였다보안장관 이름으로 참석한 거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AI인 그가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는 것도 한몫하겠지만그래서 더 이상했다여태껏 보던 그 옷의그 사람인데.

나이가…….

이 나이도 있을 만하더라고적당한 나이지.

제 말 때문에?

너 솔직히 나 어리게 보인다고 깔봤지.

아닙니다.

웃기네이제부터 나이를 먹기로 했어딱 멍청이보다 5, 6살 많이.

“……”

내가 네 조상이랑 일을 했는데 말야아주 공경이란 게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묘하게 들뜬 목소리였다.

앞으로도 언니라고 부를 거냐?

아닙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언니라언니나쁘지 않지.

그가 놀리듯 언니언니 중얼거리며 킥킥거렸다.

너 진짜 승진 대상에서 제외 시킬까도 했는데 귀여우니까 봐준다어디 잘해봐.

감사감사합니다.

무척 부끄러웠지만이때부터 흔히 말하는 라인을 탄 것이었다그에게로 향하는 직속 라인을.

이 일이 천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공부는 한 번도 지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내가 공부 체질이 아니어서인지오히려 학자인 사람이 끌린 걸지도 모르겠다박사 과정을 준비하는 한 남자랑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서로 사회적 지위가 지위인 만큼 나름 진지한 사이였다나쁘지 않은 남자였다그럭저럭 지낼 만한무엇보다 내 일에 터치하지 않는 게 좋았다서로가 서로의 일을 잘 모르는 만큼 존중해주는 것나쁘지 않은 생활이었다약혼은 순조롭다 못해 이상할 정도였다.

너 약혼했다며.

종종 내 방에 찾아오게 된 그가 대뜸 물었다휴일이었다.

할 거예요.

근무 중이 아니었으니나는 편하게 말했다그도 근무 외 시간에 너무 격식 차리는 걸 싫어했다상관과 부하의 관계지만지금은 프라이빗이었으니까이런 기호를 맞춰주는 것도 부하의 이라고 그는 말했다.

언젠데?

다음 달이요.

나 죽기 전에 너 결혼하는 걸 보다니.

아직 일러요이제 약혼인데.

죽지도 않으면서라고 말대꾸하려다가 참았다이건 *뮤트 나름의 농담일 것이다

집안끼리 인정한 약혼이면 거의 결혼이지심지어 둘이 연애하다가 이러는 거잖아중매 아니고.

괜찮은 남자길래.

그게 어려운 거야진짜괜찮다가 얼마나 어려운 조건인데.

사랑 많이 해본 아줌마처럼 말하네요.

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전부터 있었는데 연애 몇 번 못해봤을 정도로 내가 안 매력적으로 보이던?

그가 고양이처럼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뭐라고 대답하더라도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냥 흥하고 고개 돌리기로 했다그는 더더욱 격하게 웃어댔다뭐가 그리 웃긴 건지.

너 애 생기면 내가 이름 지어줄래.

이른 소리 하지 마세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네 이름도 내가 지을 뻔했었어.

진짜요?

너가 아닌가네 할머니던가?

“……”

어이가 없어져서 모니터를 향해 작은 인형을 던졌다그는 꼭 그걸 맞은 것처럼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너가 1600년 살아봐라헷갈리지!” 나는 하나 더 던지려다가 인형이 가엾어져서 말았다.

됐고귀한 시간 이런 데서 낭비해도 돼요?

한가할 때인데 괜찮아뭐 회의도 없고휴일이잖아.

저는 한숨 잘래요.

내가 방의 빛을 차단하자 그도 방해할 생각은 없는지 말없이 돌아갔다모니터 불까지 사라지고새카맣게 된 방에 나만 있었다약혼하는 것은 나인데화가 나서 씩씩대는 내가.


***


감옥은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 없는 공간이다일단 사람 살라고 만들어놓은 곳이 아니니까여기서 오래도 빌어먹었구나점점 거칠어가는 마음속 말투가 이 생활이 힘들어서인지그의 영향을 받은 게 이제야 드러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이대로면 내 수명까지 살겠지.

달빛조차 들지 않는 독방이다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방금이었는지몇 분 전이었는지 사고가 따라가지 않는다했던 말을 열 번 머릿속에서 되풀이해야 겨우 한 가지 생각이 끝난다이걸 되풀이서라도 생각할 수 있는 게 용했다옛 시절의 기억과 현재의 감정이 뒤섞여서 뭐가 언제 것인지 불분명해진다예컨대 아주 행복한 생각을 해보자새 직무실.

그래새 직무실커다란 모니터에 나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여성이 서 있었다그 큰 모니터에 비하면 작은 사람이었지만그는 바다였다지금까지 나를 헤엄치게 하는 바다나는 그의 앞까지 걸어갔다그는 소녀애처럼 나이에 안 맞게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안 어울리십니다지금 얼굴을 생각하시지요.

뭐 너는 여기 있는 게 지금 어울릴 것 같아?

어떻게 보입니까?

제 방에서 갑자기 나타난 AI 때문에 겁먹은 여자애.

여긴 제 방이 아닌데요.

이제부터 네 방이야.

*뮤트는 방의 끝에서 끝을 따라 한 바퀴 빙 돌았다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마치 창문 세워지듯 선내의 CCTV 창이 연거푸 나타났다그것이 방의 모니터를 채우자한 자리에서 이 세계의 모습은 한눈에 볼 수 있는 천리안처럼 되었다.

내가 1000년을 넘게 봐온 풍경이고앞으로 네가 남은 일생 동안 볼 풍경이지.

그의 얼굴은 고향을 찾은 사람 같았다나는 셀 수도 없는 세월 간한시도 눈 떼지 않고 보는 풍경은 어떤 느낌일까지긋지긋한 것을 넘어 묘한 사랑을 느끼는 것일까?

이걸 이제 너와 함께 볼 수 있어 기뻐.

내가 아주 잘못 생각했다는 걸 바로 알았다.

저도 기쁩니다.

“‘우리가 지키는 거야서영 부관.

.

그제서야 나는 그의 안에서 쥐가 아닌 허서영으로 기억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왜냐하면 이 다음 기억들은 이제 해이의 역사이기 때문이다내가 잘못했을까그가 잘못했을까나 때문에 그가 잘못한 걸까그 때문에 내가 잘못한 걸까그런 잘잘못을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그가 있어서 나는 이렇게 되었다그 역시 내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오히려 나는 그게 좋다내가 있어서 그가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이그의 역사에 내가 가장 큰 상처를 입힌 게 무척 좋다이 사실은 몇 번을 되풀이해도 자랑스러운 일이다나는 그의 부관 따위 되어선 안 됐다내 그릇은 결국 이정도인 것이다그가 바라던 우리보다는그의 서영이 되고 싶었던 것어릴 적 욕망의 발원이 어른이 된 후에 폭발하는 경우가 있다어릴 적 간식 못 먹고 자란 아이가 자란 후에 당뇨병 환자가 될 때까지 단 것에 집착하듯이여섯 살 때 차마 그의 앞에 나서지 못했던 나는 이 나이 되고도 그를 사랑하듯이처녀가 외간남자를 동경하듯이 군 것이다나의 사사로운 뜻에 그를 잡아먹고 만 것이다그러나 시간을 되돌린단들 내가 다른 선택을 하는 일은 없겠지나는 또 그에게 다가갈 것이다또 그를 망가뜨리겠지또 그걸 아주 좋아하겠지그리고 또 이렇게 되겠지이만하면 충분하다청승도 젊을 때 떨어야 풍류지이 나이 먹고 이러면 멍청할 뿐.

바깥 소식 엿듣기에도 귀가 멀어졌다바닷소리가 가까웠다그에겐 영혼은 없어 만나진 못하겠지만내가 지구의 바다를 가는 것 정도는 용서되겠지남들은 천국이니지옥이니 할 때 진짜 있는 먼 땅에 당도하는 것도 꽤 로맨틱한 일일 터다거기서 몸을 담글 수 있다면 정말 좋겠고볼 수 있다면 행운일 테며 혹여나 귀만 살아 소리만 듣는다고 해도 좋겠지그 소리에서 당신의 푸른빛을 나는 영원히 생각할 테니까나의 쓰나미였던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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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과 캐릭터에 관한 저작권은 전적으로 크리스틴 러브 씨에게 있으며,

위 작품에 대한 2차 저작권은 테사츄 님(@tesachu)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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