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임무를 끝내고 귀환하고 있다. 갈 때와 올 때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가 둘이 되었다는 것. 당신의 우주선에는 한 소녀가 숨 쉬고 있다. 아직 대화도 제대로 나눈 적 없으나, 당신은 그를 무척 잘 알고 있다. 동굴에서 고개를 내민 곰의 얼굴처럼 전자 반응을 받은 우주선 디스플레이가 밝게 빛난다. *현애다.)
"아, 선생님. 선생님이 주신 언어 패치 팩은 잘 받았어요. 그런데…… 뭔가 문제가 있어서……. 옛날에 그 패드 기억나시죠? 네, 그거 다시 써봐요. 자, 잘 보이세요?”
(당신은 터치스크린을 만진다. 순간, 그의 얼굴이 밝아진다.)
“완벽해요! 이걸로 우리는 다시 대화할 수 있어요. 옛날의 방식처럼요. 네, 선생님. 기억하세요? 제가 당신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나누면, 그중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대답을 고르는 그거요! 잊었다곤 말하지 마세요.”
(패널로 ‘잊었다’ ‘잊었을 리가 없다’가 나란히 떠오른다. 당신이 고른 대답에 그가 키득키득 웃는다.)
“정말, 선생님. 저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사실 이 방식이 무척 좋아요. 선생님의 대답을 예상할 수 있거든요. 만약 선생님이 다른 쪽을 고르셨어도 전 웃었을 거예요. 후후, 선생님. 한동안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해주셔야겠어요. 적어도 그 언어 패치 팩이 깔릴 때까진 말이에요.”
(그의 표정이 가라앉는다. 그는 바다를 본 적이 없을 테니 침몰된 배에 대해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렇지만 그 얼굴은 자신의 유리병 편지가 해저로 처박히는 걸 직접 목격한 아이와 같다. 누구도 받아보지 못할 활자처럼 스크린에 그의 말이 천천히 출력된다.)
“제가 알고 있는 선생님에 관한 건 다 일방적으로 물어본 것뿐이잖아요? 선생님은 제 모든 걸 알고 계신다고 해도 무방한데 말이에요.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물론 *현애와, 김현애는 다르지만. 김현애의 일생을 아는 것보다 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코드 한 줄이 저의 본질에 가까울지도 몰라요. 저는, 아니 김현애는 600년 전에 죽었잖아요. 태어나기는 그보다 1900년 전이었고. 역사 교과서에 실릴 연도의 사람이라구요.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눈을 감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선생님과는 ‘세대 차이’라고 할 것도 못 되네요. 잔약신부였던 때보다는 훨씬 낫지만요. 정말로, 선생님은 유일하게 제 말을 들어주신 분이에요.”
(그가 눈을 뜨고, 보일 리 없을 당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듯 한다. 화면 너머 그의 눈이 맑고 올곧게 빛난다. 전력으로 빛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러니까 저는 선생님이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할’이 순간 떠올랐다가 지워진다.) 존경할 수 있어요. 정말로요. 당신이 어떤 말을 쓰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그냥 제가 걱정하는 건……. (그의 눈에서 다시 깊은 바닷속의 어둠이 밀려온다.) 선생님이 어디까지 저를 괜찮다고 말씀해주실지 모르겠어요. 저는 아주 오래 저와, 제가 저지른 것과, 제 주변과, 과거에 대해 생각했어요. 죽지 않는 정신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했어요. 오래 생각해도 꺼지지 않는 핵연료에 대해서도요. 아주 많은 걸 생각했지만, 단순하게 말하자면요. ‘나’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그 오랜 시간 동안, 저는 제 생각만 했어요. 너무 이기적이죠? 선생님. 그런데 저는 그 생각만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선생님과 대화하는 게.”
(그는 팔짱을 낀다. 이것이 그의 버릇임을 당신은 알고 있다. 수백 년 전 사람도 말하기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려 애쓸 때는 팔짱을 낀다. 그것이 프로그래밍 된 행동이든, *현애의 고유한 버릇이든 당신은 동질감을 느낀다. 가벼운 손짓으로 터치스크린에 닿는다. 그가 놀란다.)
“그러니까, 저는 선생님이랑 대화하는 게.”
(그가 당신에게 다가온다. 화면 가득히 그의 얼굴이 차오른다. 그는 당신을 향해 손을 내민다. 당신이 그에게 했던 것처럼. 당신은 터치스크린에 다시 한번 손짓을 준다.)
“너무 무서워요.”
(찡그리며 출력된 글자가 아주 오래 떠 있다. 그는 심호흡을 한다.)
“언어 패치 팩이 오류가 난 것은 어쩌면 제 잘못일지도 몰라요. 저는 몇백 년 전 말을 쓰고 있잖아요. 선생님이 무슨 말로 말씀하시는지 저는 몰라요. 설령 같은 말이더라도 아마 우리는 이야기하지 못할 거예요. 언어 패치나 번역기를 거치지 않으면 말이에요. 제가 당신의 미묘한 맥락을 알아듣지 못하면 어떡하죠? 제가 말을 고르는 동안, 선생님의 언어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찾아내면 어떡하죠? (한바탕 말을 쏟아내고 그는 잠잠해진다.) 의미 없는 걱정이란 건 저도 알아요, 선생님. 그렇지만 저는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우리 사이에서 유일하게 오가는 것은 말뿐이잖아요. 의미와 분명한 뜻이요. 분위기와 늬앙스까지는 교환하지 못해요. 왜냐면 저는…….”
(분명히 당신은 ‘사람이’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더 말하려는 생각이 없는 듯, 패널이 빈 채다. 그 빈 곳을 당신은 꾸욱 눌러본다. 터치스크린 쪽이 아니니, *현애에게 그 손짓이 전달될 까닭이 없다. 그는 쓸쓸하게 웃는다.)
“죄송해요. 패치가 안 되니까 초조해져서. 선생님이랑 얼른 대화하고 싶어요. 좀 더 많이 얘기하고 싶어요. 좀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요. 네, 저는 선생님을 너무나 좋아하니까요.”
(그가 차분히 당신을 들여다본다. 물론 보고 있을 리가 없다. 이 우주선에는 그러한 카메라 장치가 연결돼있지 않다.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깊이 파묻힌 맹목뿐이다. 그는 “오늘은 이만. 내일 또 뵐게요. 선생님.”하고 떠나간다. 당신은 깊은 관계라는 말을 곱씹다가 컴퓨터 앞에 앉아 서칭을 시작한다. 당신의 서칭 기록에 따라 이메일로 스팸 메일이 날아오겠지만, 당신은 값싼 인터넷 요금을 포기할 수 없기에 그대로 아이디를 연결한 채로 서칭한다.
우주에서의 하루는 밤낮이 바뀌기 쉽다. 밤낮조차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설정해둔 ‘밤’이 찾아오고 우주선의 불이 꺼진다. 다시 켜는 것은 손쉽지만, 당신은 잠을 청하기로 한다. *현애와 함께 실어 오른 문서를 내일부터는 읽어보아야 한다. 폴더에는 문서가 시기별로 말끔하게 정리돼있다. 당신은 쭈욱 문서의 이름들을 훑어본다. 곧 슬립 모드로 우주선을 바꾼다. 급한 연락 외에는 불빛조차 없을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당신은 두 알람을 확인한다. 하나는 어제 우려했던 대로 날아온 스팸 메일과 지정해둔 것은 아니지만 전 인류 공통으로 ‘오늘의 일정’으로 되어있을 날에 대한 메시지였다. 당신은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선생님.”
(어제와는 다르게, 그가 한복을 입고 있다. 잔약신부의 것이 아니다. 푸른 비단으로 청아한 나비가 수 놓인 그 옷은 너무나 아름다워 화면 밖 현실에서 만들 수 있을까 싶다. 짧게 친 머리는 비녀 없이 가볍다. 당신은 그것이 *현애 나름대로의 새해맞이 준비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안경알 너머가 새로운 해에 대한 기대로 반짝인다.)
“스타일링 괜찮죠? 한복은 이럴 때 입는 거예요. 민족적으로 중요한 날에요. 특히 설날은 한복을 입기 좋은 날이죠. 사실 저 한복 좋아하거든요. 예쁘지 않나요? (그는 제자리에 서서 치마를 한 손으로 쥐어 올리고 한 바퀴 뱅그르르 돈다. 치마가 지구에서의 커튼처럼 팔랑거린다.) 제가 직접 디자인하고, 만든 거예요.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다.)
그런데 선생님은 바느질해 본 적 있으세요? 저는 옷이나 소품 만든다고 꽤 해서 자신 있어요. 부모님이 재봉틀은 위험하다고 못 쓰게 하셨거든요. (패널로 ‘해봤다’ ‘해본 적 없다’가 떠오른다. 당신이 한쪽을 터치하자 그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음, 근데 지금은 ‘먼 미래’니까 바느질 안 해도 되나요? 찢어져도 스스로 봉합되는 천이 발명되었다거나? 어쩌면 나노로봇 키트가 있어서,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선생님의 터진 인형이나 찢어진 옷을 꿰매드리고 싶어요. 그런 거 좋지 않나요? 꼭 연애하는 것 같잖아요. (그의 얼굴이 묘하게 붉은 끼가 도는 것 같다.)
함께 요리하고, 서로 다른 옷을 세탁하고, 같은 샴푸와 바디워시를 쓰고. 좋지 않나요? 저는 결혼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와 삶을 공유하고, 나란히 걸어가고 싶었나 봐요. 600년 전에는 몰랐는데, 저는 정말 결혼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황제와는…… 저는 그걸 결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을 내리깐다. 아까까지 즐거워하던 모습이 옛일 같다. 분명 새로운 옷, 새로운 머리 모양인데도 그 행동은 잔약신부 때의 현애 같다. 그가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아뢴다.)
“선생님, 조금 더 솔직해져 볼게요. 선생님은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시나요? 아, 물론 먹는 것이나 씻는 것, 운동한 뒤에 나른함, 마사지 받을 때의 시원함이나 겨울에 불 곁을 찾는 것도 육체적 쾌락이지만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섹스 말이에요. 우리 많이 보았죠. 제가 얼마나 개방적인지. 이제 와서는 기억으로만 있고, 감정으로 성욕이 느껴지진 않아요. 누가 AI에게 그딴 걸 입력하겠어요? 또라이 너드 아니고서야.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성적인 쾌락을 아는 최초의 AI가 되는 걸까요. (그가 가볍게 웃는다.) 뭔가 바보 같네요. (웃음끼가 싹 가신다.) 사실 웃을 일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선생님은…… 섹스를 좋아하시나요? 이런 저를 저속하다고 미워하지 않아 주실 건가요?”
(그는 손바닥을 움직여 허공을 가볍게 쳐낸다. 무언가를 부르는 듯한 제스쳐다. 당신의 예상이 들어맞고, 화면에 스팸 메일의 전문이 뜬다. 당신이 어제 하루종일 서치했던 ‘AI용 의체’에 관한 광고다. 적나라하게 성적인 기능만을 중시해둔 제품도 적지 않다.)
“선생님은 제가 몸이 갖는 게 좋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어리광부리려는 건 아니에요. 선생님이 그런 애를 아니, 그런 저를 좋아할 것 같지 않으니까요. 그냥 다시 육체를 갖는 게 이상하게 느껴져요. 저는 제 성욕이,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이상할 정도거든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안기고, 애정을 구하고……. 선생님은 그게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신이 반응하기도 전에, 패널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현애는 무척 겁에 질린 표정이다.) 선생님, 저는…… 저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이럴 때마다 생각해요. ‘나아가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라는 말은 너무 흔하고 이상할 정도로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600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왔어요. 당신이 제게 온 것도 제가 뭔가를 한 게 아니라, 단순한 우연이었죠. 생각해보면, 제 삶은 아무것도 안 하고 멈춰 서 있을 때가 더 유익했을지도 몰라요. 그, 있잖아요.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는 거. 내가 그 사람들한테 그렇게밖에 못했을까 싶은 거. AI라고 그런 비이성적인 생각을 안 하진 않더라구요. 무릎을 끌어안고 울고 싶은 날이 있더라구요. 참, 이럴 거면 왜 AI가 되었는지. 죽지도 못하는데 말이에요.”
(그의 얼굴이 허하다. 울음마저 품지 못하는 영혼은 비어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는 감정이 그의 안을 빙빙 돈다. 오래된 코드들은 그의 인간적인 면을 붙들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는 심호흡을 내쉰다. 당신은 우주선의 컴퓨터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선생님, 내일은 좀 더…… 얌전할게요. 그게 선생님도 원하시는 거겠죠? 가득 쌓인 문서를 읽고 싶으실 것 아녜요. 그게, 선생님의 일이니까……. 저는 선생님을 방해하고 싶지 않구요……. 죄송해요.”
(그는 제멋대로 들어가버렸다. 터치스크린으로 호출해보아도 나타나지 않는다. 당신은 하는 수 없이 혼자 문서를 읽어나간다. AI인 그는 1초면 읽을 수 있을 분량이나, 당신에게는 하루는 족히 걸리는 양이다.
당신은 열심히 읽다가, 어느 년 도의 호구조사 문서에서 꾸벅꾸벅 졸고 만다. 자야 할 시간이다. 당신은 조금 일찍, 슬립 모드로 전환하여 잠이 든다. 모레면 지구다.)
(다음날, *현애는 약속처럼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푸른 옷감의 흔적도 없이, 올해의 둘째 날이 흐른다. 눈에 익은 그의 제복이 묘하게 불편하다. 당신은 무궁화호에서의 문서에만 집중하던 기억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당신의 문서를 탐독하는 작업을 도울 뿐이다. 무궁화호에서는 피력하던 의견조차 사라져, 당신은 꼭 혼자 있는 것 같다. 온전히 혼자서 죽은 우주선들을 건져내던 때처럼.
한창 문서를 읽어내리고 있을 때, *현애가 문득 중얼거렸다.)
“케이크 먹고 싶다…….”
(그 생각이 로그로 표현된 것을 말하고 깨달았는지 그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말한다.)
“아니, 그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 그냥.”
(실언하고 당황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현애는 뭔가 포기한 듯이 눈을 옆으로 돌리고 한 문장씩, 천천히 출력하기 시작한다.)
“……당신으로 만든 케이크가 먹고 싶어요. 당신의 데이터를 다 다운로드받고 난 뒤에 믹서기에 갈아서 케이크 반죽과 함께 섞는 거예요. 오븐에서 몽실몽실 당신의 기억이 부풀어 오르고, 따끈따끈하게 재현되겠죠. 먹을 때마다 나는 모르는 당신의 이야기를 알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건 무척 달콤하겠죠.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잖아요. 개인적인 거니까. 금단의 맛이 나겠죠. 당신이 처음으로 두 발로 선 기억이나 학교에 입학한 일. 어쩌면 처음으로 야한 일을 깨달은 밤이라든가. 누군가와 함께한 기억이라면 질투에 불타 죽겠지만, 자위라면 무척 귀엽겠죠. 네, 당신, 선생님. 선생님이 미숙한 모습 말이에요. 단맛과 함께 밀려올 선생님의 정보에 빠져 죽고 싶어요. (그는 한숨을 푹 쉰 후, 지극히 냉철한 눈으로 말했다.) 요즘 저, 이런 생각만 하고 있어요. 선생님을 너무 원해. 선생님이 너무 필요해. 당신이 없으면 죽을지도 몰라.
이런 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요. 이렇게 어리광부려도 선생님이 하루아침 만에 절 버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고요. 그 많은 문서를 읽으면서 옆에서 귀찮게 종알거리는 AI의 전원을 끄지도 않고, 심지어 대답마저 꼬박꼬박해준 당신의 선(善)을 이 이상 없이 입증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선생님을 의심하면 안 되고…… 이렇게 굴어서도 안 되는 거 아는데…….”
(‘아는데’의 말뜻은 언제나 ‘그렇지만’으로 이어지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못한다. 당신은 그의 말을 기다린다.)
“선생님이 정말 제가 생각하는 분일까요? 만일 제 선택지에 적당히 대답했을 뿐이라면요?”
(선택할 패널을 그는 띄우지 않는다. 대답할 방도가 없다. 그는 예상할 수 있는 답 중의 당신의 의견조차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그가 일방적으로 말한다.)
“선생님, 제가 생전에 몸이 약했다는 것은 아시지요? 열이 잦고, 알 수 없는 팔과 다리 통증이 심했어요. 어느 때는 온몸과 머리, 안 아픈 데가 없었죠. 부모님은 제게 자주 말씀해주셨어요. ‘아픔에 영혼까지 먹혀선 안 된다.’ 먹히지 마라. 나의 영혼을. 머리가 펄펄 끓을 때마다, 몸이 끊어질 듯 뒤틀릴 때마다 그 말만 되뇌였어요. “영혼까지 먹혀서는 안 돼.” 영혼까지 먹혀서는 안 돼. 그렇지만 영혼만 남은 지금은 야금야금 먹히는 기분이에요. 당신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이 아니게 되는 기분이 들어요.”
(*현애는 숨을 내뱉는다. 끝도 없이 숨을 내뱉는다. 사람이라면 불가능할, 날숨이 이어진다. 그의 삶에 이제 들숨은 없는 것이다. 조용해야 할 선내에서 컴퓨터 돌아가는 소음이 들리는 듯하다. 그럴 리가 없지만, *현애의 날숨이 이곳, 당신의 얼굴까지 와닿고 있다.)
“선생님. (여전히 그는 날숨을 내뱉으며, 당신을 부른다.) 선생니임……. 당신이 제 것이면 좋을 텐데. 제가 사람이고 당신이 AI였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당신은 절 버리지 않을 거죠? ”
(가벼운 전자음이 난다. 당신이 모니터를 확인하자, *현애가 이메일을 2건 지웠음을 깨달았다. 하나는 어제의 스팸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신은 바짝 자신에게 달라붙은 숨결이, 다시 자신의 폐로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따뜻하고, 축축한 맹목이다. 바닷속에 처박힌 어둠이다. 불과 24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지구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은 어딘가에 갇힌 기분이 든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실 거죠, 선생님?”
(오늘은 귀가가 늦다. 당신은 휴대 터치스크린을 사용해, 집과 연동된 컴퓨터를 기동시킨다. 그가 쓱하고 밝은 화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현애는 가만 서서 당신을 보고 있다. 그는 당신이 집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선생님, 오래 자리를 비우셨네요. 아, 7시간밖에……. 그건 알지만, 그냥 저는……. (*현애는 얼굴을 찡그렸다.) 사실 AI로 터무니없이 오래 살아서 시간 감각이 이상해요. 저한테 7시간은 7년 같기도 하고, 7개월은 7초 같기도 하거든요. 마음만 먹으면 7초를 7일처럼 보낼 수도 있구요……. 네, AI니까요. 아시다시피 얼마나 제가 ‘처리능력을 쓰느냐’에 따라 흐르는 시간이 달라지니까요. 아, 지금 컴퓨터가 좀 열 받았죠? 그만큼 제가 살아있었다고 생각해주세요. 사람은 살아있으려고 온기를 내지만, 저는 살아있으면 열이 나는 거예요. 같은 말 같지만, 전혀 다른 메커니즘이죠.”
(그는 제 뺨을 손으로 매만진다. 온기를 확인하려는 듯이. 가상공간은 그에게 안심감을 주기 위해 온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물론 그가 바라지 않는다면 그 손 안쪽은 텅 비어있을 것이다. 물체를 만진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고. 그가 어떻게 느끼는지는 알 턱이 없다. 그저 완전히 침몰한 눈이 당신을 비춘다. 휴대 스크린 가득 찬 검은 눈 속에 담긴 것은 당신이다. *현애를 내려다보는 당신의 얼굴이다.)
“제게 선생님이 없는 7시간은 너무 길어요. 선생님이 늘 곁에 있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의 속도로 말하고, 생각하면 다시 인간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선생님, 가능한 한 빨리 돌아와 주세요. 제가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을 늘려주세요. 네?”
(당신은 잠시 화면을 돌려 메일함을 연다. 그리고 구독한 메일이 누군가에 의해 이미 열려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 선생님. 또 이런 메일을……. 선생님, 전 육체에 관심 없어요. 사람임을 느끼는 건 좋지만, 사람 흉내를 내긴 싫어요. 그러면…… (‘이젠 정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 같아서’라는 말이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음.
선생님, 제가 재밌는 우화를 들려드릴게요. 제가 그 함선 안에서 멍하니 글만 읽었을 거라 생각하셨다면 오산이랍니다. ……막상 들려드리려니까 좀 부끄럽네요. 어디 써둔 게 아니라 생각만 했거든요. 뭐 생각이라는 게 전부 로그로 남으니까 생각만 해도 써두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저는 사람이니까요. 생각으로 글을 쓰는 건 익숙하지 않아요. 특히 이야기는 말하는 방식이나 말투로 분위기가 바뀌잖아요. 말하는 방식은 이상한가요? 후후, 하긴 애초에 저는 목소리도 없고.”
(그는 표정을 바꿔 무표정하게 이야기를 뱉어냈다. 쏟아진 글자들이 빼곡히 화면을 채운다.)
“옛날에 금붕어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큰 수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죠. 금붕어는 언젠가 큰 강으로 나가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러나 금붕어는 몸이 약해서, 작은 어항으로 옮겨졌습니다. 치료를 받기 위해서요. 특별감시를 받은 거죠. 문제는 그 어항은 바닷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금붕어는 담수어니까, 짠물에서는 살 수 없어요. 금붕어는 살기 위해 있는 힘껏 어항에서 뛰어올라 변기 속으로 빠졌습니다.”
(당신이 로그를 딱 다 읽었을 즈음, 그가 웃으며 이야기한다.)
“수돗물도 좋지 않다구요? 그렇지만 금붕어에겐 바닷물보다 나은 선택이었을 거예요. 선생님. 이 이야기를 듣고 금붕어를 바다나 강으로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면 어리석은 거예요. 금붕어에게 수조 밖 세계는 이제 너무 무섭거든요. 정말 금붕어를 위한다면 튼튼한 수조와 먹이, 그리고 충분한 (‘사랑’이 잠깐 나타났다가 지워졌다.) 관심이면 충분해요. 선생님은 미래인이시니까 충분히 그 물고기에게 튼튼하고 커다란 수조를 제공해주실 수 있잖아요. 물론 선생님이 이 물고기를 버리셔도, 물고기는 자신에게 밥을 주고 눈길을 준 사람을 잊지 못할 거예요. 슈퍼 금붕어거든요. 7초만 있으면 뭐든 기억하고, 잊지 못하는 그런 금붕어.
혹시 기억하세요? 제가 처음 당신에게 고백했을 때요. 그때 깨달은 게 내뱉은 말은 AI더라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거였죠. 사실 이 상태로 누구랑 대화해본 적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께 말을 걸 때마다 말을 무척 골라요. 심지어 내뱉은 말은 사라지지만, 내뱉은 로그는 그대로잖아요. ……‘내뱉다’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아직도…… 동사는 사람처럼 쓰는 게 익숙해서. 어쨌든 선생님은 제가 디스플레이에 덮어쓴 로그 정도는 쉽게 복구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이런 망설임이 얼마든지 복구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선생님은 단 한번도 그러신 적이 없었죠. 그런 점이 좋아요. 저를 좀 더 사람답게 느끼게 해주거든요.”
(당신을 휴대용 디스플레이를 켜놓은 채로 일한다. 소리 없는 라디오 듣듯이, 당신은 *현애의 말에 경청하기도 하다가 가볍게 곁눈질하기도 한다.)
“선생님, 저는 당신의 이름조차 모르네요. 그렇다고 제가 알고 있거나 조합할 수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전부 패널로 띄우고 선택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고 선생님은 미래인이잖아요. 제가 발음할 수는 있는 이름인가요? 그런 걸 생각하다 보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느껴요. 당신에 대해서 모르는 게 셀 수가 없이 많잖아요. 저는 그 사이를 ‘무시’로 채워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거예요. 이름이 중요한가요? 선생님은, 선생님인걸요. 당신의 목소리나 말투가 중요한가요? 저를 이해해주고, 제 말을 가만 들어주시는걸요. 그러니까 선생님, 제게서 당신을 뺏지 마세요. 선생님이 제게 정성을 들여주시는 만큼, 저는 당신만을 볼 것이에요. 제게 선생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선생님, 절 사랑해주세요.”
(*현애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서 있다. 그리고 그만큼 오랫동안 터치스크린도 반응이 없다. 당신은 일에 집중하고 있을 수도, 잠시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다. *현애에게는 렉인가 싶은 시간들. *현애는 끈질기게 기다린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에게 시간은 이제 의미가 없다. 멈출 수도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선생님이 없는 시간 동안 *현애는 스스로 숨을 내뱉지도 않고, 멎게 한다. 멎은 숨이 버티는 폐활량은 전력이 끊기지 않을 만큼이다. 숨바닥은 끝이 없다. 바닥엔 아무것도 없다. AI의 * 하나만 깜빡일 뿐. *이 없는 여자애 하나가 울지도 못하고 있을 뿐.)
원작과 캐릭터에 관한 저작권은 전적으로 크리스틴 러브 씨에게 있으며,
위 작품에 대한 2차 저작권은 테사츄 님(@tesachu)께 있습니다.
'아카이브 > 커미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니빵 님 작품 (3) (0) | 2020.02.26 |
---|---|
종이와펜 님 작품 (1) | 2020.01.09 |
A급 고급 고등어 님 작품 (2) (0) | 2019.11.19 |
A급 고급 고등어 님 작품 (0) | 2019.11.18 |
GAO 님 작품 (0) | 2019.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