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처음 본 것은 무척 멀리서. 난 아직도 또렷이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문틈의 작은 사이를 한가득 채운 푸른빛. 그 사람은 '지구의 바다' 같았다. 집안 어른의 뒷모습에 가려져 반쪽뿐인 눈과 손동작. 내게 그녀는 결단코 직접 볼 수 없는 미지였다. 한껏 귀 기울여 그 목소리를 듣는 게 고작인. 내가 별생각 없는 아이였다면 그 자리에 바로 뛰쳐들어가 그 사람과의 첫 만남이 좀 더 빨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건방진 꼬마라는 첫인상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 만일 그날, 정면에서 그 사람을 봤더라도 나는 그를 '바다'라 생각했을까. 만일은 만에 하나, 아주 희귀한 확률일 뿐. 내가 그런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이렇게 그리워할 수 있는 거겠지.
"아까 통신하던 분, 누구예요?"
"*뮤트라는 분이란다. 우리 집안이 보좌하는 보안 장관이시지."
"저도 만날 수 있어요?"
어른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가 훌륭한 어른이 된다면."
그 훌륭한 어른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끙끙댔다. 그 사람과 만날 수 있다면 뭐든 내바칠 수 있겠다는, 이상한 오기. 고작 여섯 살이었던 나에게 가문의 생업을 가르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이었다. 보안 장관을 보조하는 것이 우리 가문의 생업, 나의 숙명. 무척 가슴이 뛰었다. 나의 피엔 그 사람 곁에 있을 수 있는 허가가 있는 셈.
어른들이 뮤트와 통신하는 주기를 알고부터는 늘 훔쳐보게 되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지만, 그 푸른빛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왜, 그런 말 있지 않은가. 승부는 삼세판까지, 사람은 세 번 용서한다. 뮤트에게 나의 존재는 그런 거였다. 딱 3번까지. 그러니까 내가 엿본지 네 번째 되는 때였다.
"그런데 관사에 쥐가 있는 모양인데. 다른 곳도 아니고 보안부에 그런 게 있으면 안 되겠지."
"쥐요?"
그 사람의 시선이 나로 향했다고 느꼈다. 아주 순간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화들짝 놀라 문을 닫지도 않고 방까지 빠른 걸음으로 갔다. 뛰면 안 돼. 여기는 관사고 나는 허 씨 가문의 사람이니까. 방까지 도착하고 닫은 문에 기대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바들거렸다. 못된 짓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무서움보다는 그 사람이 나를 발견했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어른에게 혼나는 것을 능가하는 공포가 있는 걸 처음 알았다. 색색, 숨을 고르는데 방 모니터가 갑자기 들어왔다. 푸른색. 바다.
"안녕, 빌어먹을 쥐."
방 가득 들어온 바닷물에 목이 턱 막혔다. 절여질 것 같은 오싹함.
"안녕하세요."
떫은 침을 삼키고, 그 사람을 자세히 보았다.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을 것 같은, 어른보다는 언니 같은 사람. 가지런히 정리한 금빛 단발이 인상적인 소녀였다. 이 사람이 뮤트. 이 배의 보안 장관.
"뮤트님이시죠?"
"허, 멍청한 쥐인 줄 알았건만 꽤 영특한 쥐구나."
생긴 것과 달리 말투는 어른의 그것이었다.
"그래, 왜 그런 건지 들어나 볼까?"
"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4번째야. 네 이름 앞에 붙는 성씨를 생각해서 삼세판. 3번 봐줬어. 그래놓고 지금 일부러가 아니라고?"
그 사람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네가 태어나서 출생신고 찍히는 거까지 전부 내가 확인했는데 이런 쥐새끼처럼 자라다니."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내가 또박또박 말하자 그 사람은 모니터에서 튀어나올 듯이 다가왔다. 배경의 푸른빛은 점점 사라지고 그 사람으로 방이 그득 찼다. 쓰나미였다. 모든 걸 집어삼킬 커다란 파도. 파도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지지 않고 바라봤다. 그렇지만 사람이 바다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꽉 문 뺨을 눈물이 적셔가는 게 느껴졌다. 무서웠다.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제대로 일이나 하겠어?”
“할 거예요! 저도 어른 되면 일할 거라구요!”
내가 악을 쓰듯 소리를 지르자, 그 사람은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음엔 볼 땐 만날 만한 사람이 되어있거라. 빌어먹을 쥐야.” 그리곤 왔을 때처럼 가버리고 말았다.
그때서야 나는 내 이름만으로는, ‘허’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훌륭한 어른, 그 사람에게 만날 만한 사람. 그게 나의 목표가 되었다. 그 뒤로는 그 사람과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지 않았다. 쥐라고 불린 게 여간 자존심 상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 어린 나이에도. 아니, 그 나이라서 더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 나름의 오기였다. 제대로 볼 수 있을 때까지는 그 목소리조차 귀에 담지도 않겠다는. 밤말 엿듣는 쥐가 아니라, 파도에 휩쓸리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 큰 바다에 올라타 여행하는 선장이 되고 싶었다.
그 후, 그 사람을 만난 것은 내가 중등학교에 들어가는 열여섯 살 때였다. 이른바 사교계 데뷔였다. 정계 어른분들께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는 자리.
그 사람은 이제 바다가 아니었다. 우리 가문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는 *뮤트였다. 이제 그 이름 앞에 붙는 별의 의미를 모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가 여전히 내 어린날 기억 속의 소녀여도 난 놀라지 않았다. 그가 변덕스럽게 겉모습을 바꾸는 걸 싫어하는 어른도 있었다. 진지하지 못하다며. 나는 그저 우스웠다. 그 무섭던 바다가, 내 또래 여자애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른들의 소개를 통하는 것이 무난하고 예의 바를 것이다. 어른들이 나를 *뮤트에게 인사시키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됐다. 하지만 인파 사이에서 눈에 익은, 그 금발이 보이자 나는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새삼 내가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영이구나.” 언젠가 본 적 있는 류 씨 집안사람이었다. 나는 그 인사를 들은 체 만 체하며 그 사람 앞에 섰다. 그 사람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술잔을 쥐고 있었다.
“나름 사람 몰골로 자랐구나.”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인사 올립니다. *뮤트님. 저는 허서영입니다.”
“흐응, 나쁜 버릇은 고친 모양이지?”
“전날에는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무엇이 재밌는지 하하, 하고 웃었다.
“그래. 10년은 강산만 바꾸는 게 아니라 쥐도 바꾸는구나.”
잔을 홀짝이며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화면 너머 푸른 눈이 무척 반짝이며 아름다웠다. 이 역시 어린 날, 내가 그를 바다로 착각했던 이유 중 하나였겠구나 싶었다.
“아가한테 술은 못 주겠고. 뭐 바라는 거라도 있어 왔겠지?”
얄상궂게 웃는 그 눈이 내 속에 자존심을 자극했다.
“앞으로 10년 뒤. 저는 당신이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 다시 인사드릴 겁니다.”
“그러기를 비마.”
“꼭이요!”
그렇게 나는 10년 만에 그 사람에게 선전포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어른들에게 버릇없이 굴었다고 혼나긴 했지만.
물론 그 뒤에도 *뮤트를 만날 일이 없진 않았다. 그렇지만 나도, 그도 입을 맞춘 듯이 필요 이상의 말은 주고받지 않았다. 그는 여섯 살의 나에서 무언가를 본 것일까, 아니면 열여섯 살의 나에게서 무언가를 본 것일까. 어쨌든 그는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는 때를.
학교를 졸업하고 여차여차 첫 배속을 받게 된 날의 밤. 형식적인 절차와 축하 연회가 겨우 끝나고 내 방에 들어왔다. 처음엔 조금 설렜던 제복에 벌써 피로가 묻어있었다. 방문을 닫자마자 모니터가 절로 켜졌다. 그리고 특유의 푸른 배경.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뮤트가 나타났다. 컴퓨터를 몇 번 바꾸긴 했지만, 약 20년 전 그때와 거의 똑같은 상황이었다. 나 하나만 쑥 컸을 뿐.
“이제 엿듣더라도 쥐가 아니라 우리 쪽 사람이 되었군.”
내 제복 차림을 훑어보며 한 첫마디. 아주 흡족해보이는 말. 사실 이 상황이 오면 벅찰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았다.
“당신 옆자리에 설 거예요.”
“포부가 좋은 건지, 바보인 건지 모르겠는데.”
*뮤트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의 대외적 모습을 본 적도 있지만, 내게 *뮤트는 여전히 10살 중반의 소녀였다. 꼭 벌레를 본 아이처럼 망가진 얼굴이 도저히 나보다 연상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이제 막 밑바닥에 들어온 신입 나부랭이가 하기엔 위험한 발언이야.”
“10년 전에는 막 학교에 들어가던 나부랭이, 그보다 10년 전에는 남 말이나 엿듣는 쥐새끼였는데, 앞으로 10년 후에 어떤 나부랭이가 될 줄 알고요?”
“하, 건방지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아가씨.”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닥이는 모습이 몇 년지기 친구처럼 편해보였다. 나는 아직도 그가 왜 날 마음에 들어했는지 이유를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그를 좋아한 이유는 안다. 그 작은 체구에서 보이는 여유를, 나는 동경했던 것이다. 그게 그가 인간이 아니라 가능한 것임을 알면서도.
“제복 잘 어울리는데. 몇 년은 입히고 싶어.”
“평생 입을 테니 걱정 마시죠.”
“나한테 신입 겁줘서 내쫓는 취미 없는 걸 감사하게 여기는 게 좋겠군.”
그는 허공에 손을 뻗더니 어디선가에서 담배 개피를 꺼내들었다. 불이 붙어있는 상태인지 별다른 행동 없이 바로 입에 물었다.
“이상해요.”
*뮤트는 별말 없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보았다.
“그런 모습으로 담배 피우는 거 인륜적으로도 잘못됐지만, 나 자랄 동안 모습이 그대로인 게 말이 돼요? 그런 거 자연스럽지 못해요.”
“포부가 큰 게 아니라 멍청이로군.”
내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한모금 내뱉더니, 제 뒤쪽으로 담배를 던져버렸다. 전자니까 불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이 짧게 스쳐지나갔다.
“상사한테 이딴 식으로 말하고 승진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 말하고는 나가버렸다. 불도 안 켠 방을 채우던 모니터빛이 사라지자 무척 어두웠다. 진즉 나가버린 모니터 앞에 서자, 제복을 입은 어색한 내 모습이 비췄다. 아까 *뮤트를 봤을 때와 비슷한 얼굴을 지어보았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사나운 눈초리였다. 당장이라도 웃음 터트릴 것 같던 그의 마지막 얼굴과는 정반대인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말단인 내가 보안장관과 만날 일은 없었다. 그의 명백하게 나를 비웃는 그 얼굴을 마지막 기억으로 삼은 채로 한 해가 꼬박 지났다. 2년차에 꽤 보직 같은 보직을 얻었다. 첫 해는 인턴 같은 것이었다. 일하는 법을 배우자 일을 하는 건 금방이었고, 권리가 늘어난 만큼 책임도 늘었다.
새해의 연하 파티. 보안부의 사람이 아니라 ‘허’ 가문의 자제로서 참석하는 자리였다. 제복이 아닌 연회복이 오랜만이었다. 말단일 때는 조용히 지내는 게 베스트라는 집안 어른들의 말씀을 따라 이러한 자리에 참석을 지양했다. 성실함을 보여주는 게 보안부 사람으로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먼발치에서 그의 금발이 보였다. 그것까지는 다를 바가 없었지만, 뭔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묘하게 키가 큰 것 같은? 은근히 궁금했지만, 눈앞의 어른들을 상대하는 것도 이제는 무시 못할 나의 ‘일’이었다. 제 상사만 챙기는 모습이 좋게 비칠 리 만무했다. 혹여나 아첨 떠는 놈으로 보이기는 싫었다. 돌고 돌아 겨우 그의 앞에 갈 수 있었다. 내가 처음 뱉은 말은, 나도 놀랄 정도였다.
“……언니?”
나보다 다섯, 여섯은 많아 보이는 외형이었다. 나는 이런 나잇대의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내 말에 푸하핫, 웃으며 보란 듯이 팔짱을 끼며 담배를 물었다.
“이 모습이면 불만 없나?”
나는 대기 자세로 서서 가만있었다. 착장은 연회복이었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반응이 없자, 그는 바닥에 재를 탁탁 털며(물론 진짜로 재가 있을 린 없지만) 말했다. “근무시간도 아니고 그러지 마. 나 그런 거 안 좋아해.”
그 나이에 담배를 물고, 안대를 낀 모습은 영락없는 군인이었다. 그 위화감이 이 사람이 나의 상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나이라는 게 무시할 게 못되는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옷 예쁘네.”
“감사합니다.”
“우리 제복 입은 게 더 보기 좋지만.”
그는 제복 차림 그대로였다. 보안장관 이름으로 참석한 거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AI인 그가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는 것도 한몫하겠지만. 그래서 더 이상했다. 여태껏 보던 그 옷의, 그 사람인데.
“나이가…….”
“아, 이 나이도 있을 만하더라고. 적당한 나이지.”
“제 말 때문에?”
“너 솔직히 나 어리게 보인다고 깔봤지.”
“아닙니다.”
“웃기네. 이제부터 나이를 먹기로 했어. 딱 멍청이보다 5, 6살 많이.”
“……”
“내가 네 조상이랑 일을 했는데 말야. 아주 공경이란 게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묘하게 들뜬 목소리였다.
“앞으로도 언니라고 부를 거냐?”
“아닙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언니라, 하. 언니, 나쁘지 않지.”
그가 놀리듯 언니, 언니 중얼거리며 킥킥거렸다.
“너 진짜 승진 대상에서 제외 시킬까도 했는데 귀여우니까 봐준다. 어디 잘해봐.”
“가, 감사, 감사합니다.”
무척 부끄러웠지만, 이때부터 흔히 말하는 ‘라인’을 탄 것이었다. 그에게로 향하는 직속 라인을.
이 일이 천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는 한 번도 지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공부 체질이 아니어서인지, 오히려 학자인 사람이 끌린 걸지도 모르겠다. 박사 과정을 준비하는 한 남자랑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서로 사회적 지위가 지위인 만큼 나름 진지한 사이였다. 나쁘지 않은 남자였다. 그럭저럭 지낼 만한. 무엇보다 내 일에 터치하지 않는 게 좋았다. 서로가 서로의 일을 잘 모르는 만큼 존중해주는 것.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다. 약혼은 순조롭다 못해 이상할 정도였다.
“너 약혼했다며.”
종종 내 방에 찾아오게 된 그가 대뜸 물었다. 휴일이었다.
“할 거예요.”
근무 중이 아니었으니, 나는 편하게 말했다. 그도 근무 외 시간에 너무 격식 차리는 걸 싫어했다. 상관과 부하의 관계지만, 지금은 프라이빗이었으니까. 이런 기호를 맞춰주는 것도 부하의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언젠데?”
“다음 달이요.”
“허, 나 죽기 전에 너 결혼하는 걸 보다니.”
“아직 일러요. 이제 약혼인데.”
죽지도 않으면서, 라고 말대꾸하려다가 참았다. 이건 *뮤트 나름의 농담일 것이다.
“뭐, 집안끼리 인정한 약혼이면 거의 결혼이지. 심지어 둘이 연애하다가 이러는 거잖아. 중매 아니고.”
“괜찮은 남자길래.”
“그게 어려운 거야. 진짜. 괜찮다, 가 얼마나 어려운 조건인데.”
“사랑 많이 해본 아줌마처럼 말하네요.”
“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전부터 있었는데 연애 몇 번 못해봤을 정도로 내가 안 매력적으로 보이던?”
그가 고양이처럼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대답하더라도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냥 흥하고 고개 돌리기로 했다. 그는 더더욱 격하게 웃어댔다.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아, 너 애 생기면 내가 이름 지어줄래.”
“이른 소리 하지 마세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네 이름도 내가 지을 뻔했었어.”
“진짜요?”
“아, 너가 아닌가? 네 할머니던가?”
“……”
어이가 없어져서 모니터를 향해 작은 인형을 던졌다. 그는 꼭 그걸 맞은 것처럼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너가 1600년 살아봐라! 헷갈리지!” 나는 하나 더 던지려다가 인형이 가엾어져서 말았다.
“됐고. 귀한 시간 이런 데서 낭비해도 돼요?”
“한가할 때인데 괜찮아. 뭐 회의도 없고. 휴일이잖아.”
“저는 한숨 잘래요.”
내가 방의 빛을 차단하자 그도 방해할 생각은 없는지 말없이 돌아갔다. 모니터 불까지 사라지고, 새카맣게 된 방에 나만 있었다. 약혼하는 것은 나인데, 화가 나서 씩씩대는 내가.
***
감옥은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 없는 공간이다. 일단 사람 살라고 만들어놓은 곳이 아니니까. 여기서 오래도 빌어먹었구나. 점점 거칠어가는 마음속 말투가 이 생활이 힘들어서인지, 그의 영향을 받은 게 이제야 드러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이대로면 내 수명까지 살겠지.
달빛조차 들지 않는 독방이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방금이었는지, 몇 분 전이었는지 사고가 따라가지 않는다. 했던 말을 열 번 머릿속에서 되풀이해야 겨우 한 가지 생각이 끝난다. 이걸 되풀이서라도 생각할 수 있는 게 용했다. 옛 시절의 기억과 현재의 감정이 뒤섞여서 뭐가 언제 것인지 불분명해진다. 예컨대 아주 행복한 생각을 해보자. 새 직무실.
그래, 새 직무실. 커다란 모니터에 나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여성이 서 있었다. 그 큰 모니터에 비하면 작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바다였다. 지금까지 나를 헤엄치게 하는 바다. 나는 그의 앞까지 걸어갔다. 그는 소녀애처럼 나이에 안 맞게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안 어울리십니다. 지금 얼굴을 생각하시지요.”
“뭐 너는 여기 있는 게 지금 어울릴 것 같아?”
“어떻게 보입니까?”
“제 방에서 갑자기 나타난 AI 때문에 겁먹은 여자애.”
“여긴 제 방이 아닌데요.”
“이제부터 네 방이야.”
*뮤트는 방의 끝에서 끝을 따라 한 바퀴 빙 돌았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마치 창문 세워지듯 선내의 CCTV 창이 연거푸 나타났다. 그것이 방의 모니터를 채우자, 한 자리에서 이 세계의 모습은 한눈에 볼 수 있는 천리안처럼 되었다.
“내가 1000년을 넘게 봐온 풍경이고, 앞으로 네가 남은 일생 동안 볼 풍경이지.”
그의 얼굴은 고향을 찾은 사람 같았다. 나는 셀 수도 없는 세월 간, 한시도 눈 떼지 않고 보는 풍경은 어떤 느낌일까. 지긋지긋한 것을 넘어 묘한 사랑을 느끼는 것일까?
“이걸 이제 너와 함께 볼 수 있어 기뻐.”
내가 아주 잘못 생각했다는 걸 바로 알았다.
“저도 기쁩니다.”
“‘우리’가 지키는 거야. 서영 부관.”
“네.”
그제서야 나는 그의 안에서 쥐가 아닌 허서영으로 기억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 왜냐하면 이 다음 기억들은 이제 해이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했을까, 그가 잘못했을까. 나 때문에 그가 잘못한 걸까, 그 때문에 내가 잘못한 걸까. 그런 잘잘못을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 그가 있어서 나는 이렇게 되었다. 그 역시 내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게 좋다. 내가 있어서 그가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역사에 내가 가장 큰 상처를 입힌 게 무척 좋다. 이 사실은 몇 번을 되풀이해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나는 그의 부관 따위 되어선 안 됐다. 내 그릇은 결국 이정도인 것이다. 그가 바라던 ‘우리’보다는, 그의 ‘서영’이 되고 싶었던 것. 어릴 적 욕망의 발원이 어른이 된 후에 폭발하는 경우가 있다. 어릴 적 간식 못 먹고 자란 아이가 자란 후에 당뇨병 환자가 될 때까지 단 것에 집착하듯이, 여섯 살 때 차마 그의 앞에 나서지 못했던 나는 이 나이 되고도 그를 사랑하듯이, 처녀가 외간남자를 동경하듯이 군 것이다. 나의 사사로운 뜻에 그를 잡아먹고 만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린단들 내가 다른 선택을 하는 일은 없겠지. 나는 또 그에게 다가갈 것이다. 또 그를 망가뜨리겠지. 또 그걸 아주 좋아하겠지. 그리고 또 이렇게 되겠지. 이만하면 충분하다. 청승도 젊을 때 떨어야 풍류지, 이 나이 먹고 이러면 멍청할 뿐.
바깥 소식 엿듣기에도 귀가 멀어졌다. 바닷소리가 가까웠다. 그에겐 영혼은 없어 만나진 못하겠지만, 내가 지구의 바다를 가는 것 정도는 용서되겠지. 남들은 천국이니, 지옥이니 할 때 진짜 있는 먼 땅에 당도하는 것도 꽤 로맨틱한 일일 터다. 거기서 몸을 담글 수 있다면 정말 좋겠고, 볼 수 있다면 행운일 테며 혹여나 귀만 살아 소리만 듣는다고 해도 좋겠지. 그 소리에서 당신의 푸른빛을 나는 영원히 생각할 테니까. 나의 쓰나미였던 당신을.
원작과 캐릭터에 관한 저작권은 전적으로 크리스틴 러브 씨에게 있으며,
위 작품에 대한 2차 저작권은 테사츄 님(@tesachu)께 있습니다.